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29. 20:10


볼키의 영화 프리즘

- 쇼생크 탈출 -


글 / 그림 김동혁
작가 홈페이지 : www.gospeltime.kr
연재사이트 : 풀빵닷컴에서 카툰 중 볼키 


 



영화는 메타포다. 메타포란 은유, 혹은 상징이라 표현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번역할 만한 단어가 없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대한 이해는 각자의 느낌과 정서에 많이 좌우된다. 영화 또한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열린 결론을 가진 영화는 관객들에게 숙제를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영화의 메타포는 감독에 의해 상당수 그려진 메타포라 할 수 있다. 베토벤 음악이라기 보다는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란 곡을 듣는 것과 같다. 각자의 메타포는 틀리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다 다른 느낌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참 의미 있는 영화들을 보며, 내 나름대로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영화는 정말 괜찮아 하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은 대중을 끄는 매력적 요소들을 영화 안에 담겨 놓았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 영화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런 영화 중 첫 번째 생각나는 영화가 바로 <쇼생크 탈출>이다.


촉망받는 은행 간부 앤디 듀프레인(Andy Dufresne: 팀 로빈슨 분)은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다. 주변의 증언과 살해 현장의 그럴듯한 증거들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질범들만 수용한다는 지옥같은 교도소 쇼생크로 향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처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사실 법정에서 비일비재 일어난다. 그리고 법정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기보다는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 쪽에 추가 기울어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앤디 듀프레인이 결백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교도소의 절망적 삶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가히 절망적인 상황에...


신참이 오면, 누가 먼저 울 것인지에 대한 내기를 건다. 레드는 앤디가 처음에 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울지도 않았고 1달여 기간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감정통제를 하지 못한 수감자는 울고 항변한다.


‘나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과거, 중요하다. 진실 규명해야한다. 하지만, 과거도, 진실도 현재에 기반한 것이다. 현재를 극복하지 못하면 과거는 의미 없다. 어처구니 없고,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 하더라도 과거에 대한 한풀이와 항변은 사실 아무런 의미 없이 다가올 수 있다. 결국 오늘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과거의 부당한 결과라 하더라도 오늘 당장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쓸려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가혹한 현실을 앤디가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느낀 메타포는 이렇다.


감옥 = 세상

소장 = 집권자(통치자)

간부 = 정치권

간수 = 경찰

죄수 = 힘 없는 서민


민주주의는 주민이 시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는 것 같다. 정권을 잡은 자가, 기득권을 가진 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배를 위해서 일한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허울 좋은 말만 늘여 놓는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가 하나 작용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나 또한 기독교인이다. 신실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통치자들이나 집권자들이 성경에 감화를 받아 일한다는 명목으로 성경 혹은 종교를 이용한다. 영화에서 소장도 겉보기에는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얼마나 위선적인 자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8:15)

예수님이 정말 싫어하신 부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종교지도자들과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정말 싫어하셨다. 이 소장의 메타포와 오늘날 부를 축적하는 기득권층들, 그리고 정재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 부를 축척하시는 높으신 종교인, 혹은 종교지도자들이 일치하는 것은 왜일까?


듀프레인을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엔디이다. 영화는 제 3자의 관점에서 듀프레인을 묘사하면서 더욱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을 준다. 듀프레인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적응해 나간다.


그에게 본격적인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보그스가 그를 성적인 욕망의 도구로 범한다. 이 장면에서 레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But prison is no fairy tale world

(교도소는 동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이 이야기를 보면서,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현실은 생각대로,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은 냉혹하다. 그리고 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바로 현실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레드의 시각이다.


또한 이것이 현실이고, 가장 보편화된 생각이다. 하지만 차이는 생각에 있다.
누군가는 그런 현실을 동화로 만들고, 신화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숨겨진 듀프레인의 시각이다.
영화는 이 레드와 듀프레인의 시각적 대립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는 현실에 타협하지만, 또한 누군가는 현실 넘어 큰 이상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더 많은 풍요와 꿈을 꾼다. 하지만, 듀프레인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그도 현실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듀프레인이 당한 처절한 아픔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끔찍한 악몽이지만, 거쳐야 할 과정인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런 특별한 이야기들이 가득한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큰 일들을 이룰 수 있는 이루어지는 동화같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 레드는 보그스를 움직인 다른 존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상의 모든 악들은 사실 심판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악의 결과들, 악의 잔챙이들만 처리하는 건 아닌가란 생각을 한다. 진짜 그들을 조정하고 그들을 움직이는 지능적인 악한 세력들은 유유히 세상을 통치하며 즐겁게 살고 있는 것처럼, 쇼생크의 소장은 절대적권력을 가지고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마음껏 자신만의 독재제국을 건설한다.



 

희망을 가진 듀프레인에게 기회가 생겼다. 간부 중 하나가 유산을 받게 되었는데 세금 때고 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불평하게 된다. 이 때, 듀프레인은 세금 없이 모든 유산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삶에 있어서 언제나 기회는 온다. 그 기회를 용기 있게 나설 때에야 기회가 결실을 맺게 된다. 듀프레인이 간부에게 이 문제를 다룰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제지하였다. 그러나,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듀프레인이 얻게 된 것은 보상으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달라 하여, 동료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 보그스(동성애자)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소장은 듀크레인의 명석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척한다. 각종 세금탈루, 차명계좌, 불법증여 등 모든 법적 악행과 사기를 저지른다.


 


여기서 꼭 다루어야 할 만한 인물이 나온다. 50년을 복역한 브룩스.

그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가 자유를 찾았지만, 그는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비록 시민이 되었지만, 그는 또다른 감옥에 같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살한다. 그리고, 거의 유사한 시간을 함께 보낸 레드


그 또한 브룩스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평생을 감옥에 보냈고, 새로운 세상은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다. 브룩스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도 함께 바람처럼 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듀프레인으로 인해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

창살 없는 입시지옥인 학교, 힘겹게 들어간 대학에선, 감당하기 힘든 등록금으로 평생 빛쟁이가 되던지, 아니면 대학 내내 일을 하다가 졸업을 해야 하는 현실,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쳤음에도 마땅히 일할 곳들은 없는 시장, 그리고 힘있는 세력들이 곧 들이닥칠 경제개방(FTA). 이런 환경 가운데서, 대부분은 브룩스와 레드처럼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처럼,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여 버린다. 그리고 순응해 버린다. 너무 쉽게 적응해버린다. 그

하지만, 만약 듀프레인과 같은 친구를 만나게 되면 어떨까?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누군가를, 그리고 희망을 실천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멘토가 우리네 삶에 있는가?...
없다면?
...내가 그러한 대안적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순 없을까? 






듀프레인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계획된 탈옥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처럼, 소장을 심판한다. 퇴직금을 받아들고는.



쇼생크 탈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 하면 대부분 탈옥한 후 비를 맞을 때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죄수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삭막한 회색빛의 공간에 들려지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마치,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시 희망을 품게 하는 파랑새와 같은 것이었다. 힘든 행군 중에 마시게 되는 시원한 물과 같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듀프레인은 1달동안 독방에 갖춰지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들이 뺏을 수 없는 것이 있지. 그것은 바로 희망! 음악은 희망과 같은 거야!’


무력으로도,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희망일 것이다. 우리가 가진 소망일 것이다. 그것이 때론 값진 댓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때론 레드가 말했던 것처럼 위험한 생각일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희망을 불씨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너무 쉽게 운명이란 족쇄에,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적응해 버리고 살아가는, 무력해진, 열정을 잃어버린 나에게 다시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내가 가진 희망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